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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편지] 신화를 정말 믿었을까

그리스인은 계절의 변화를 신화로 설명한다. 그 유명한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다. 들판에서 꽃을 모으던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에게 납치돼 저승의 여왕이 됐지만, 이승의 어머니 데메테르에게는 딸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곡식의 여신인 데메테르가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지상의 곡물이 시들어갔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신에게 딸을 되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미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음식’인 석류알 6개를 먹었기에 1년 중 6개월은 저승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6개월은 페르세포네가 친정에 돌아와 살게 되었고, 딸과 재회하는 데메테르의 행복은 지상의 식물을 다시 자라게 했다.   이렇듯 자연현상을 우화적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방식이 고대 그리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전래동화도 7월 칠석날 견우(Altair)와 직녀(Vega)가 까치다리(은하수)를 건너 1년 만에 한 번씩 만나는 기쁨의 눈물로 보슬비를 설명한다. 어린 시절 해마다 칠석이 돌아오면 한결같이 보슬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이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는 그들의 종교에 직결되어 성격이 좀 다르다. 그들이 신화 이야기를 정말로 믿었을까 궁금하다. 농사를 지으면서 데메테르에게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 미혼의 딸이 요절했을 경우 페르세포네에게 바치는 석류를 든 모습으로 장례 석상을 만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는 신화를 대할 때 의외로 현실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폴 베이(1930∼2022)는 신앙에 대해 재미있는 관찰을 했다. 무언가를 믿고 동시에 안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성경을 받들면서 다윈의 진화론과 현대 우주론을 연구하는 과학자일 수도 있듯이.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신화 신화 이야기 그리스 신화 어머니 데메테르

2023-06-23

[아메리카 편지] 서양의 나쁜 엄마

북미에서 기념하는 어머니날(5월 14일)을 보내며 동양과 서양의 어머니상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다. 어버이날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라는 노래 구절을 떠올리니 한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인정·찬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내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반면 외국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가끔 만난다. 나로선 이질감이 느껴진다.   어머니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우리와 상반되는 서구 전통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는, 비참하고 앙심으로 가득 찬 어머니상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메데이아다. 남편 이아손의 배신을 참지 못해 복수의 결심을 하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살해한다. 이아손의 씨를 말린다는 이유로 자기 자식을 직접 살해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등장하는 메데이아는 그러한 잔인한 결심에 대해 번뇌를 느끼기도 하지만 모성애는 복수심을 초월하지 못했다. 태양신 헬리오스를 할아버지로 둔 덕에 영웅의 자격 조건을 갖췄던 메데이아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기는커녕 할아버지가 보낸 금빛 마차를 타고 그 자리를 탈출해 재혼까지 한다.   황당하기는 두 자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로크네는 남편인 테레우스가 필로멜라를 범하고 말을 못하게 혀를 잘라버리자, 필로멜라와 힘을 합쳐 자신과 테레우스의 아들인 이티스를 죽인다. 그리고 이를 요리해 테레우스에게 먹였다.   아무리 과장된 이야기라 해도 종종 이렇게 잔인한 엄마들이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를 뿌리로 둔 서양의 문화에서 모성애를 운운하는 맥락은 우리의 정서와 좀 다른 것 같다. 어머니의 사랑을 체계적으로 예찬하는 동양의 문화적인 슬기가 더더욱 마음에 다가온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서양 엄마 그리스 신화 고대 그리스 태양신 헬리오스

2023-05-26

[아메리카 편지] 고대 그리스의 두 여성상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라 하면 보통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남성적 인물들을 떠올지만 그리스 신화에는 수많은 여성 영웅들도 등장한다. 그중 대표 격인 헬레나와 페넬로페는 각각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여주인공으로, 상반되는 그리스의 여성상을 상징한다. 제우스신의 딸인 헬레나는 남편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를 버리고 젊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난, 말 그대로 ‘나쁜 여자’의 원형이다. 헬레나를 찾아오겠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사건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리스인들은 헬레나를 진실한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의 신적인 아름다움을 숭배했다. 여성의 권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사회에서 애정과 마음을 따라 행동하는 그의 추진력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타카의 여왕 페넬로페는 한마디로 그리스의 춘향이다. 남편 오디세우스가 10년간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고, 또 10년에 걸친 모험적인 귀향을 하는 동안의 긴 세월을 일편단심으로 기다렸다. 페넬로페도 미녀로 유명했고, 영리하다는 명성도 떨쳤다. 비판할 여지도 있다. 그 20년 동안 성년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는 왕의 자리를 이어받지 못했고, 청혼을 빌미로 궁전에 눌러앉은 108명의 구혼자가 왕실의 부를 다 써버리는 걸 방치했으니 무책임한 왕비이기도 했다.   내가 가르치는 ‘그리스의 영웅들’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헬레나와 페넬로페 중 어떤 여성상이 더 이상적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날이 갈수록 여학생들이 페넬로페를 더 지지하는 경향이 보인다. 1970년대 『비행공포』라는 소설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페미니스트 작가 에리카 종이 근래에 한 불평이 생각났다. “우리 세대의 모토는 섹스와 자유였는데, 우리 딸들은 오히려 아기 낳고 가정을 꾸려 나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느 선상에 있는지를. 김승중 / 고고학자 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그리스 여성상 고대 그리스 그리스 신화 여왕 페넬로페

2023-04-14

[열린광장] 내 맘속의 ‘쇠 침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라는 이야기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잡아 늘이고 줄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힘이 엄청나게 센 거인 악당으로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면서 강도질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그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말하자면, 이 황당한 신화는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로 비유되면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만들어 내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쇠 침대’ 하나쯤은 마음속에 하나씩 감춰 두고 있다고 한다. 이는 각자가 가진 나름의 원칙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생각과 가치관이 있으니 일단은 ‘내 기준’의 편견이 우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고 나의 말과 행동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 또한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나, 백 번을 양보하여 개인과 작은 집단이 가진 이 ‘쇠 침대’가 이기(利己)와 다양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 나아가 그것이 절제 없이 확대되어 사회 통제의 기준으로 발전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냐면 그런 ‘나’들이 모이고 쌓이면 ‘패거리’가 된다.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들은 평생 ‘우리 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기준’을 고집하면서 세상을 재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회 구조를 획일적으로 이런 잣대의 침대들을 깔아 놓고 그에 맞추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일까? 그것은 요즘의 서구적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대놓고 그렇게는 못한다.   지금 지구촌 각 곳에서 집권 세력 주변에는 이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설치해놓고 나라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남미 어떤 나라의 통치권자가 그렇고, 내 고향 나라와 그 북쪽에 포진하고 있는 권력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소리 없이 아무나 잡아다가 침대 길이에 자기들 구미대로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의 침대에는 길이를 조정하는 비밀장치가 있어서일까? 그들은 그것을 ‘개혁’ 이니 ‘’척결‘이란 미명으로 프레임을 씌워 상대를 잡아 늘이고 줄이려는 불법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 시대 왕조 사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거의 날마다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멋모르게 덫에 걸려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의 구 소련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한 일들이 저질러진 것은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그런 가하면 지금의 대명천지 21세기에도 우리 고국 북쪽에서는 이런 식의 ’동물농장‘을 개업한 이후 70년이 흘렀다. 이렇듯 그들은 케케묵은 원조 공산주의자 레닌의 바이블인 선동 선전술을 환생시켜 국민을 편 가르고 우민화(愚民化)시켰다.   하지만 그처럼 흉악한 악행도 동시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서 끝장이 났던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 같은 침대에 눕히고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 처치해 버림으로써 이 신화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마치 못된 놈에게 늘 당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눈은 눈으로 갚아 준다‘는 아이러니한 심리적 징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보복은 끔찍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을 열광케 하기도 하니까.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조국에서 일어났던 드라마 같은 실제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다시 한번 훑어보다가 문득 떠오른 그리스 신화 한 토막이었다. 손용상 / 소설가열린광장 맘속 침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침대 길이 그리스 신화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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